[청년칼럼] 빚투, 이게 최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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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빚투, 이게 최선인가
  • 김혜현
  • 승인 2018.12.0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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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때
김혜현 기자
▲김혜현 기자


[미디어라인=김혜현 기자] 최근 유명인이나 혹은 그의 부모가 과거에 빚을 지고 갚지 않았다며 이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기사가 연달아 나오고 있다. 마이크로닷에서 시작하여 그 고발의 흐름이 끊이지 않자, 다수의 일부 언론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빚투(빚too)’라고 하기 시작하였으며, 후에 ‘빚투’가 들어간 제목의 기사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빚투’는 ‘미투 운동’과 피해사실을 폭로하는 현상이 이어진다는 점이 유사하여, ‘미투 운동’을 패러디하여 생긴 신조어이다. 그런데, 과연 ‘빚투’는 최선이었을까? 필자는 ‘빚투’라는 단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 단어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미투 운동’은 사회적으로 침묵하기를 요구받았던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들이 다른 사람의 용기가 되어 다른 피해자들 역시 점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회적 움직임이다. 이는 2017년 10월, 미국에서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와인스틴이 30여년간 성범죄를 행하였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이에 그간 피해사실을 숨겨왔던 피해자들이 더 이상은 성폭력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소셜미디어에 ‘#MeToo’를 달아 피해사실을 밝히면서 시작되었다. 후에 우리나라에서는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하면서부터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그간 정치계, 문화계, 스포츠계, 연예계, 종교계, 교육계, 기업계 등 사회 곳곳에서 벌어졌던 성폭력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피해사실을 고발한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피해사실에 대한 사회적 분노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해사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성희롱을 감수해야 했고, ‘피해자다움’을 요구받았으며 심지어는 ‘꽃뱀’이라고 불리는 등 여러 차원에서의 2차 가해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피해자들은 침묵하지 않고 사회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용기임을 알기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며 자신과 다른 피해자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가 모여 조금씩 사회의 변화를 일구어내고 있다. 그렇기에 ‘미투 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피해사실에 대한 사회적 폭로의 흐름이라며 최근 유명인 관련 채무 논란을 ‘빚투’라고 명명하며 패러디 하는 것은 자신을 짓누르던 권력과 사회에 저항하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행태이며, 나아가 사회운동인 ‘미투 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다.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들은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 내고 그 파급력은 굉장하다. 따라서 언론의 단어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빚투’를 남발하는 행태에는 이에 대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 이에 언론의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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